“불의 사자” 김충기 목사의 삶과 사역


2019년 12월 25일 오후 4시 “불의 사자”로 불린 성령사역자 김충기 원로목사님이 소천 했다. 은혜지를 통해 원로목사님이 이 땅 가운데 남긴 사역을 2회에 걸쳐 정리하고자 한다. 1부는 삶의 일대기, 2부에서는 평가에 관해 다룰 것이다. 


1. 성장기

김충기 목사는 1932년 6월 19일 충청남도 부여에서 출생했다. 아버지 김사인은 유교적 전통을 가졌으나 어머니 김경자는 결혼 전부터 신실한 기독교인이었다. 그래서 기독교인이라는 이유로 30년간 남편의 모진 박해를 받았다. 머리카락을 잘리기도 하고 매를 맞기도 했다. 하지만 박해를 받은 다음날에 오히려 더 정성스럽게 밥을 지어놓고 교회에 갔다. 김충기 목사는 이러한 어머니의 모범을 통해 신앙을 배웠고, 어린 시절부터 어머니의 손을 잡고 함께 교회에 다니면서 신앙생활이 시작되었다.


어머니는 아들의 신앙생활에 대한 결단이 확고한 사람이었다. 그녀는 김충기 목사가 한 달에 몇 번씩 드리는 제사 음식을 못 먹게 하였고, 일제 강점기에 학교에서 요구하는 신사참배와 주일등교를 허락하지 않았다. 그리고 늘 아들을 위해 열심히 기도하였다. 이러한 어머니의 믿음과 철저한 신앙양육은 김충기 목사가 목회자로 성장하게 된 큰 동기가 되었다. 


그러나 믿지 않는 아버지의 핍박 속에서 신앙 생활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았다. 이러한 핍박은 김충기 목사의 동생 효부가 샘에 빠져 죽게 되자 극에 달했다. 예수 때문이라며 어머니와 김충기 목사는 아버지로부터 심한 매질을 당해야만 했고 아버지는 일을 내팽개치고 술과 노름으로 시간을 허비했다. 그러나 이러한 아버지의 핍박과 가난의 어려움은 김충기 목사의 인내 또한 자라게 했다. 


어머니를 따라 처음 신앙생활 한 곳은 원당침례교회였다. 원당교회는 강경침례교회로부터 복음이 전해져 1905년에 성도들의 자원으로 지어진 교회였다. 그러나 신사참배와 황궁요배를 거부하던 동아기독교는 일제의 함흥재판소에 의해 1944년 5월 10일에 교단 해체령을 선고 받아 교회 건물은 모두 폐쇄 되고, 예배행위가 일체 금지되었다. 이 영향으로 김충기 목사가 다니던 원당침례교회도 일제의 탄압을 받았고 교회 종탑을 빼앗기도 하였다. 


김충기 목사의 성장기에 가장 큰 영향을 준 사람은 박기양 목사였다. 박기양 목사는 1916년 예천구역 새원교회에서 이종덕 감독의 설교를 통해 복음의 사람이 되어, 오지와 산지로 복음을 전하는 전도인이었다. 박 목사는 신성균, 신용균, 주상득 등과 함께 예천, 단양, 충주, 서울, 원산, 함흥, 장진, 회청, 자성을 거쳐 압록강을 건너 임강현까지 1,500리의 길을 걸어서 복음을 전한 신실한 전도자였다. 그는 전도하다 일본 헌병에게 무고한 고문을 겪기도 했으며, 시베리아에서는 추위와 배고픔에 목숨을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하였으며, 제 2차원산 사건 때 일제에 구속되어 심한 고문을 받았던 동아기독교를 대표하는 9인의 지도자였다. 김충기 목사와 그의 어머니는 1946년 8월 3일 금강에서 박기양 목사에게 침례를 받았다. 


그러던 중 김충기 목사는 1950년 6?25전쟁에 참전하게 된다. 최전방에 배치되어 생사를 오가는 전투의 현장에서 지옥을 경험하였다. 옆에서 포탄이 터지고 동료들이 비명을 지르며 죽어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뿐이었다: “하나님 제가 여기서 살 길이 없습니다. 저를 살려주십시오.” 기도를 외치며 포탄을 피해 달리기 시작했다. 정신 없이 달려 그가 도착한 곳은 후방 헌병 초소였다. 그러나 헌병들은 다시 소총을 주며 올라갈 것을 명령했고 어쩔 수 없이 다시 총알이 빗발치는 전투에 참여했다. 그리고 그는 결국 날아온 포탄에 큰 부상을 입고 말았다. 피로 물든 몸을 이끌고 인민군을 피해 북한강을 건넜으나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 


하나님의 은혜로 김충기 목사는 연대본부 위생병에게 발견되어, 국군 수도병원에서 치료를 받았으나 생사를 오갔다. 의식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김충기 목사는 하나님께 쉬지 않고 이렇게 기도했다: “하나님, 이대로 저를 데려가시렵니까? 이제는 살아도 주를 위해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해 죽겠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하나님께서는 그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셨다. 몸을 회복한 김충기 목사는 1년 반 후에 명예 제대를 했고 기도대로 자신의 모든 삶을 하나님께 바치기로 서원했다. 그의 목회사역이 시작된 것이다. 스무 살이 된 김충기 목사는 당시 대전역 앞 명월관 자리에 세워진 ‘중동성경학원(현 침례신학대학교의 모체)’ 별과에 입학했다. 


2. 초기 목회


1955년 김충기 목사가 첫 목회지로 충남 서천군 화양면 망월리에 있는 망월침례교회에 부임하였다. 당시 김충기 목사는 아직 신학교에 입학하기 이전이었지만, 박기양 목사는 김충기 목사로 하여금 교역자가 없어 몇 달 동안 예배를 드리지 못하고 있는 망월침례교회에서 사역하도록 하였다. 망월침례교회에서 사역하면서 그는 신학교에 입학했다. 


그러나 젊은 신학생이었던 김충기 목사에게 목회생활은 그리 쉽지 않았다. 생각처럼 교회는 부흥되지 않았으며, 학교에서 배운 신학과 현장 목회의 온도차를 알게 되는 연단의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아무도 없어 방치되던 교회는 조금씩 성장하였고, 교인들은 김충기 목사의 방에 놀러와 밤이 늦도록 성경이야기를 듣곤 했다. 그리고 김충기 목사가 마을 아이들과 즐겁게 놀아주며, 성경이야기를 구연동화로 재미나게 풀어주자 많은 아이들이 김충기 목사를 따르며 말씀 듣기를 즐거워하였다. 


1958년 8월, 김충기 목사는 부여군 세도면에 위치한 반조원침례교회로 사역지를 옮기게 되었다. 그리고 새로 부임한 반조원침례교회에서 망월리의 부농의 딸이었던 아내 박인애 사모를 만나 1958년 10월 18일 박기양 목사의 주례로 가정을 이루었다. 그러나 전도사 부부의 삶은 그리 녹녹하지 않았다. 당시 사례비로는 죽을 끓여 먹기도 어려워 박인애 사모는 파출부 일을 하여 생계를 꾸려야 했다. 쌀이 자주 떨어져 남편의 밥은 차려주어도 박인애 사모는 굶는 날이 많았다.


가난도 문제였지만 사역은 더 어려웠다. 처음 80명이었던 교인은 점점 줄어 12명이 되었다. 가난과 사역의 어려움은 김충기 목사를 절망으로 밀어 넣었고, 모든 것을 포기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말씀을 가르치면서도 확신이 없었고, 그의 마음에 사랑은 점점 사라지고, 미움과 원망으로 가득 찼다. 


1960년 8월, 김충기 목사가 마음이 어렵고 힘들 때에 한 평신도의 권고로 김충기 목사는 계룡산 정상 금잔디밭 부흥집회에 참석하였다. 김충기 목사의 평소 예배 모습과는 다른 북을 치고 나팔을 불고 손뼉을 치는 집회의 모습에 처음에는 기도도 나오지 않고 그 곳에 오래 있고 싶지도 않았다. 그러나 김충기 목사가 기도를 시작하자 마음에서 진실된 회개와 뜨거운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리고 방언이 자신의 입에서 터지며 하나님의 임재를 경험하였다. 이렇게 한 주간의 집회 일정을 마친 그는 몸과 마음은 기쁨과 감사가 넘쳐났다. 


교회로 돌아와 시작된 철야 기도는 8월에 하산하여 다음 해 5월까지 강력한 성령 체험을 경험하며 지속되었다. 기도하다 쓰러져 자고, 일어나면 또 다시 기도했다. 강력한 성령 충만을 체험한 김충기 목사는 깊은 회개로 기도의 문이 열렸고, 깨닫지 못하던 말씀의 계시가 확실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김충기 목사가 변화되자 그의 말씀을 듣는 성도들에게 변화가 성령의 역사가 일어났다. 6월 첫째 주일, 김충기 목사가 말씀을 선포하자 성도들에게 전정한 회개가 솟아났고, 성령께서 뜨겁게 역사하셨다. 이날부터 매일부흥회가 50일간 지속되었다. 성령께서 역사하시니 설교에 능력이 있고 교회는 늘 차고 넘치게 되었다. 그러나 사람들이 매일 철야 기도회를 하니 식사를 하다가도 자고 일을 하다가도 졸곤 했다. 그래서 김충기 목사는 성도들이 교회에 오면 잠을 재웠는데, 누가 깨우지 않아도 새벽예배 시간만 되면 모두 깨어나 함께 예배를 드렸다.


하나님의 놀라운 임재를 체험한 김충기 목사는 부흥사로서의 사역을 시작하게 되었다. 또한 계룡산에서 하나님의 은혜를 경험한 오관석, 안중모 목사 등과 함께 ‘세계기도동지회’를 구성하고 함께 교회 부흥사역을 위해 힘썼다. 이렇게 능력을 받은 부흥사들은 1970-80년대 한국교회의 부흥의 시대를 이끌었다. 


3. 부흥사역의 시작


1962년 김충기 목사는 4년 간의 반조원침례교회에서의 사역을 마무리하고 함열침례교회에서의 사역을 시작했다. 함열침례교회는 안수집사가 담임목사를 구타해서 내보내는 등 안수집사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분쟁이 심한 교회였다. 교회의 사정을 잘 알고 간 김충기 목사는 부임한 첫 예배 때에 “이 교회는 밑 떨어진 가마솥 같으니 쇠망치로 부수어서 용광로에 넣어 새 솥을 만들려 한다.”고 담대히 선포했다. 그러자 그 안수집사는 김충기 목사가 건방지다며 추방운동을 전개했다. 그러나 김충기 목사와 사모는 하나님께 이 문제를 맡기고 간절히 기도드리었더니, 안수집사가 앓았던 의술로도 고치지 못한 중병을 김충기 목사의 기도를 통해 낫게 하셨다. 방해꾼이던 안수집사가 참 일꾼으로 변화된 것이다.


김충기 목사는 매주 부흥회를 인도하기 위해 출타하였으나 금요일 밤에는 항상 함열침례교회에서 철야예배를 인도했다. 열정의 설교와 기도가 있는 철야 예배는 놀라운 성령의 역사들일 있어났으며 소문을 듣고 찾아온 많은 사람들로 가득했다. 그 중에 서울에서 공부하고 온 촉망받는 젊은이였으나 관절의 마디가 굽어지고 온몸이 떨리는 불치병을 얻은 최함향이라는 성도가 있었다. 그가 자신을 위해 기도해 줄 것을 간청할 때에 김충기 목사와 부흥회에 참여한 성도들은 그의 회복을 위해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데 성도들의 간절한 기도가 뜨거워지자 그 형제가 갑자기 일어나 걷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넘어지고 일어나는 것을 반복하다가, 곧 구부러진 다리가 펴지고 방안을 성큼성큼 걸어간 것이다. 


부흥회 스케줄이 2년 후까지 잡혀있는 상태 1965년이 되었다. 그런데 33년 된 성산장로교회의 한 집사가 김충기 목사를 찾아와 자신의 교회에서 집회를 열어 줄 것을 간곡히 부탁했다.  그래서 기존 일정을 취소하고 성산장로교회에서 부흥회를 하는데, 10여명이 모인 그곳에 어린 꼽추 자녀를 둔 어머니가 김충기 목사 앞에 데려와 기도를 요청했다. 


김충기 목사가 어머니에게 “기도하면 낫겠는가? 믿는가?” 물으니 어머니는 “예, 믿습니다”했다. 김충기 목사는 야고보서 5장 15절 말씀을 외치며 간절히 기도했다. 하나님은 기도에 응답해 주셨고 꼽추 자녀의 등이 펴졌다. 그리고 김충기 목사는 부흥회를 한 주 더 연장했다. 꼽추 자녀를 둔 어머니는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로 가정에서 핍박 받아왔는데 자녀가 낫자 남편과 시아버지도 한 주 더 연장된 부흥회에 참석해 예수님을 믿게 되었다. 그리고 병 고침의 소문을 듣고 몰려온 무당 셋을 포함한 모든 사람들에게 성령이 임하는 역사가 일어났다. 예배를 마치고 마을 사람들은 부적과 미신들을 불태우며 하나님을 찬양하였다.


1967년 김충기 목사는 대구중앙침례교회에 부임하였다. 대구중앙침례교회는 내부 분열이 일어나 담임목사가 쫓겨나고 교인들도 모두 떠나 10여명의 성도뿐이었다. 그리고 대구는 장로교의 교세가 강했고, 침례교는 이단취급을 당했다.


그러나 김충기 목사와 사모는 열심히 기도하였고 점점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다. 이러한 사역의 열매는 부흥으로 나타나 10명이었던 성도는 700명으로 늘어났다. 부흥회 때에는 더 많은 이들이 교회로 모였고, 하나님께서는 김충기 목사의 설교를 통해 역사하셨다. 


4. 강남중앙침례교회 목회


1975년 12월, 김충기 목사는 서울에 개척하기로 마음을 먹고 장소를 찾다가 강남구 청담동 학동빌딩 3층에 90여 평을 구하게 되었다. 그리고 1976년 2월 1일 오후 3시, 40여명의 성도와 함께 강남중앙침례교회의 창립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주일 간 창립 부흥회를 실시했다. 창립부흥회를 통해서 성령께서는 놀랍게 역사하셨고, 부흥회가 끝나고도 간곡한 부탁들이 많아 주일 예배 후 3시에 매주 부흥성회를 열게 되었다. 이 부흥성회는 주일 예배보다 더 많은 성도들이 참여하였고, 2년 간 지속되었다. 


김충기 목사와 사모는 시간이 나는 대로 청담동과 학동일대를 다니며 전도와 심방에 주력했으며 성도들도 동참하여 복음 전도에 힘썼다. 교회는 급격하게 성장하였고, 개척한지 1년이 못되어 250명이 예배에 참석하는 부흥을 이루었다. 


강남중앙침례교회는 늘어난 성도로 인해 교회 건축을 위한 준비를 시작하였다. 김충기 목사는 교회 건축 준비를 위해 먼저 금요일 밤 철야기도회를 시작하였다. 1977년 5월 30일에 교회 신축 부지를 매입하였고, 같은 해 11월 14일 교회 건축 기공예배를 드렸다. 그리고 1978년 11월 19일 교회 입당 예배를 드렸고, 교회 공사는 1980년 9월 27일에, 조경, 마당 포장, 부대시설 공사는 1981년 6월 14일에 완료되어 교회 봉헌 예배를 드렸다. 교회 건축과 함께 장년 교인 뿐만 아니라 교회학교도 급속히 성장하였다. 교회는 개척 10여년 만에 교역자가 20명, 행정 간사가 20명, 직분자 800명, 재적 성도 1만 명의 교회가 되었다. 또한 교회학교에 출석하는 학생이 2,500명에 달하였다. 따라서 1983년 교육관 기공예배를 드리고 대규모의 교육관이 세워졌다.


김충기 목사는 1977년 교회 건축과 동시에 기도원으로 적합한 부지를 찾기 시작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도원을 세우고 싶은 마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당한 부지를 찾지 못하다가 1980년 양평 청계산 기슭에 기도처를 구하였으며, 1982년 8월 28일 기공예배를, 1995년 9월 17일 ‘양수리 수양관’ 봉헌예배를 드릴 수 있었다. 이곳에서 김충기 목사는 산상부흥성회를 수시로 개최하였고, 봄과 가을에는 목회자 세미나를, 여름과 겨울에는 교파를 초월한 많은 교회들 수련회 장소로 활용하도록 하였다.


김충기 목사는 자신의 독특한 방법으로 교회들의 개척을 지원하였다. 2년간 물질과 인력을 부족함 없이 지원하고 자립한 이후에는 독립하게 하는 것이다. 이러한 방식으로 1976년 육군제일교도소의 희망교회부터, 고성중앙침례교회, 강원중앙침례교회, 안산 한샘침례교회, 천안 남부침례교회, 충남 금산침례교회, 경남 한려중앙침례교회 등 국내 30여개와 인도, 필리핀, 브라질, 인도네시아, 대만, 아프리카 가나 등 20여개의 해외 교회, 수도군단교회 건축, 해군본부교회의 지원 등 국내외 선교를 지원하였다. 


김충기 목사는 또한 지교회들도 세웠는데, 1997년에는 분당 강남중앙침례교회(현 꿈꾸는교회)를, 2001년에는 일산 강남중앙침례교회를, 2002년에는 용인 강남중앙침례교회(현 하나엘교회)가 개척되도록 지원했다. 


5. 교단의 부흥


김충기 목사는 교단을 사랑하고 교단의 발전을 위해 열심을 내었다. 그는 1988년 3월 침례회보 사장으로 취임하여 교단지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으며, 월간지로 발간되던 것을 주간지로 증간시키는 일에 앞장섰다. 또한 제 19대 한국기독교부흥사협의회의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다음해인 1989년에는 제 45대 총회장으로 취임하여 1990년에 있을 ‘제 16차 침례교세계대회’를 준비하였다. 김충기 목사는 ‘제 16차 침례교세계대회’의 대회장으로 참석하여, 수많은 성도들이 부활을 고대하며 침례를 받는 의식에서 김충기 목사를 포함한 많은 목사들이 여기 참여한 수많은 사람들에게 침례를 주기도 하였다. 그 외에는 1991년 한국기독교기도원 총연합회 총회장, 한국 기독교 총연합회 공동회장, 세진회 이사, 군선교회 이사 등 교단과 초교파적 사역에 헌신하였다.


김충기 목사가 교단에 가장 큰 공헌을 한 것은 교단의 부흥에 이바지한 것이다. 1946년 동아기독교의 교세는 남한교회 40개로 약 350명의 교인에 불과했다. 1952년 미국 남 침례교의 한국선교부가 창설되어 지원을 받기 시작하였지만, 한국 침례교는 총회분열시대(1959-1968년)를 맞이하며 부흥의 기회를 더디게 하였다. 그래서 침례교단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못하였고, 이단으로 불리어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김충기 목사의 교단을 초월한 부흥 사역을 통해 침례교회의 명성을 널리 알릴 수 있었고, 교단이 크게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7. 사역의 마무리 


김충기 목사는 침례신학대학교 목회대학원을 졸업한 후, 한국 침례교회의 전기를 마련했다는 평가를 받아 침신대를 비롯해 미국 그랜드캐니언 대학교와 텍사스의 댈러스침례대학에서 명예 신학박사학위와 명예철학박사 학위를 각각 받았다. 40여명의 성도들과 함께 강남중앙침례교회를 개척해 놀라운 부흥의 역사를 이뤄낸 한국교회와 침례교단의 전설적인 부흥사였고, 김충기 목사의 부흥운동은 한국교회를 넘어 미국과 대만 등 기독교 전체에 끼친 공헌은 측량할 수 없을 만큼 지대했다. 특히 아들이 아닌 당시 침신대 교수였던 피영민 목사에게 2대 후임 자리를 물려준 것은 아름다운 승계로서의 시대적인 공헌으로 기록되었다.


그러나 2019년 12월 25일 크리스마스는 슬픔으로 다가왔다. 한국교회 부흥의 큰 별이자 꽃피는 침례교회를 이끌었던 김충기 목사가 향년 889세의 일기로 주님 품에 안긴 것이다. 주님의 나심을 기뻐하는 성탄절에 김충기 목사의 소천은 침례교단뿐만 아니라 한국교회 전체에 크나큰 슬픔을 던져주기에 충분했다. 


8. 사역 평가


1) 말씀 중심의 사역자

김충기 목사가 자신의 사역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성도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올바르게 설명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늘 김충기 목사의 고민은 어떻게 하면 하나님의 말씀을 잘 이해할 것인가 하는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고민들로 그는 말씀을 전하는 방식에 대해 새로운 변화들을 도입하였다. 


첫 번째 시도는 설교할 때에 성경구절을 직접 인용하는 것이었다. 직접인용을 통해 말씀을 전하니 성도들은 말씀의 능력으로 더 큰 은혜를 받았다. 모든 설교를 말씀으로 시작해서 말씀을 마쳤으며, 성경본문을 통해서 해답을 찾아가도록 설교하였다. 김승진 교수는 이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강남교회 개척 당시 김충기 목사님의 별명은 ‘몇 장 몇 절 목사님’이었다. 설교 중에 성경 말씀을 줄줄이 외우시는 것을 들으면 탄성이 절로 난다. 성경 귀절들이 주제별로 머릿속에 입력이 되어 있는지 어떤 주제에 대해 말씀을 시작하면 ‘요한복음 몇장 몇절,’ ‘로마서 몇장 몇절,’ ‘사도행전 몇장 몇절,’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성경 귀절의 말씀들이 듣는 이들의 영혼을 찌르기도 하고 싸매기도 하고 책망하기도 하고 치료하기도 한다. 성경말씀 그 자체가 영적인 파워로 역사를 한다.


김충기 목사가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전하기 위한 노력의 두 번째는 칠판설교를 시작한 것이다. 말로만 전하는 설교가 아니라 눈으로 보이는 설교를 시작한 것이다. 김충기 목사는 설교를 하며, 주제에 대한 개요나 그림을 그려가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였다. 이러한 칠판설교의 유익에 대해 허긴 박사는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오늘날 김충기 목사님이 이 교단과 한국교계에 영력 넘치는 은혜의 말씀으로 영성 부흥운동을 주도하고 있는 비결은 그의 ‘칠판설교’의 메시지 전달 방법입니다. 대중 부흥사들 가운데 유독 ‘칠판설교’라는 독자적 방법으로 말씀을 선포하는 부흥사는 김충기 목사님 뿐입니다. 성경의 핵심적인 진리를 칠판에 도해하면서 말씀을 선포하기 때문에 설교가 성경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성경에서 시작하여 성경으로 말씀을 끝맺도록 풀어 사람의 말이나 소리가 나타나지 않습니다. 분명히 김충기 목사님의 칠판설교는 한국개신교 부흥역사에 있어서 기억되어야 할 획기적인 설교방법입니다.” 


이와 같이 김충기 목사는 가장 중시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온전히 전하기 위해 항상 고민하였고, 이러한 고민의 결과로 성경 인용의 방식과 칠판 설교의 방식을 통해서 하나님의 말씀이 중심된 설교를 전할 수 있었다.


2)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기도

김충기 목사는 1960년 계룡산에서의 기도를 통해 성령의 역사를 체험했다. 그리고 김충기 목사가 집으로 돌아와 한 것은 9개월간 교회에 앉아 쉼 없이 기도하는 것이었다. 성령께서 김충기 목사의 기도에 강력하게 역사하신 것이다. 이렇게 성령이 역사하시는 기도를 통해 김충기 목사는 교만한 자신의 모습을 버리고 회개와 눈물로 주님께 매달릴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나약함을 깨닫고 자신의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되었다.


이렇게 시작된 김충기 목사의 기도생활은 능력 있는 목회를 이끌어가는 가장 큰 원동력이 되었다. 그의 기도에 대한 생각은 그의 행동에서 잘 나타나는데, 서울에 개척을 하고 부흥을 경험하여 교회 건축을 계획할 때에 그가 가장 먼저 한 것은 금요철야기도회를 통해서 성도가 함께 간절히 기도하는 것이었다.


3) 위기를 이기는 소명의식

김충기 목사는 전쟁을 통한 생사의 경험에서 살리시는 하나님을 경험하였고, 어떠한 상황이 되더라도 혹여나 죽음의 상황이 오더라도 맡겨진 사역에 대한 열정과 책임감으로 전진하는 모습을 보였다. 1997년 6월 2일 이러한 김충기 목사에게 위협적인 건강의 위기가 찾아왔다. 쉼 없이 부흥집회를 진행하고 주일에는 6번의 설교를 강행했던 그는 월요일 아침에 일어나 심방을 위해 샤워를 하고 화장실을 나오면서 의식을 잃고 푹석 주저앉고 말았다. 김충기 목사는 의식을 잃고 사경을 헤맸다. 의식을 차리고도 도저히 몸을 움직일 수 없었다. 모든기력을 쏟았던 터였다. 그러나 그에게는 이미 약속된 미국 뉴욕연합집회가 있었다.


김충기 목사는 몸은 비록 손가락 하나조차도 원대로 움직일 수 없었지만,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맡기신 사역은 반드시 해야 할 뿐 아니라 분명히 할 수 있다는 믿음을 가졌다. 그 믿음대로 김충기 목사는 일정이 다가오자 거짓말처럼 일어나 비행기를 탔다. 맡겨진 미국 집회를 마무리하였다. 


이처럼 김충기 목사는 자신의 사역에 대한 하나님의 인도를 신뢰하였고, 자신이 맡은 소명에 대해 열악한 상황이 올 때에도, 책임의식과 열정을 가지고 임하였다. 이러한 김충기 목사의 소명의식은 그의 좌우명에서도 잘 나타난다. “나의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라!”


4) 복음 선포와 교회개척의 정신

김충기 목사는 하나님께서 주신 소명의 중심을 복음 선포와 교회개척으로 보고 힘을 쏟았다. 김충기 목사는 이처럼 복음 전파를 통한 영혼 구령에 중점을 두었고, 열정을 쏟았다. 이러한 영혼구령의 열정은 교회 개척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자신의 교회뿐만 아니라 개척 교회를 세우는 일이 자신의 소명임을 알았고, 교회 개척이 막히는 것은 하나님의 뜻이 아니라 생각했다. 이러한 그의 생각이 드러나는 사건이 있었는데, 그것은 부흥의 터전이었던 대구 중앙교회를 사임하고 서울로 개척한 일이었다. 김충기 목사가 마음을 바꾸어 서울로 개척하게 된 원인에 대해 피영민 목사는 이렇게 기록 한다. 


“김충기 목사는 고령 지역에서 교회 묘지를 매입하고 동촌에 있는 비행장에 새로운 침례교회를 개척하고자 했고, 월배 지역에도 침례교회의 개척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교인들은 교회버스도 사고, 교회를 더 확장한 연후에 지교회를 개척하자고 김충기 목사의 계획에 반대하였다. 김충기 목사는 이러한 반대를 하나님의 뜻으로 받아들이고 대구를 떠나 서울에서의 새로운 사명을 위해 출발하게 되었다.”


김충기 목사는 교회가 없는 곳에 새로운 교회를 세워 영혼을 구령하는 것이 자신의 소명이었다. 그는 국내 30여개의 개척교회와 3개의 지교회, 20여개의 해외 교회를 개척하였고, 선교사 파송과 선교 사업에 대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또한 김충기 목사 자신도 기회가 닿는 대로 국내?외로 순회하며 복음 전파에 앞장섰다.


5) 능력의 설교자

김충기 목사의 설교에는 능력이 있었다. 김충기 목사의 설교를 통해 많은 이들이 하나님을 만났으며, 믿는 성도들은 그의 설교를 통해 새로운 힘을 얻고 믿음의 삶을 다짐할 수 있었다. 김충기 목사의 이러한 영감이 넘치는 권능의 설교에 대해 이호문 목사는 다음과 같이 기술했다. 


“그는 성령 충만한 능력의 사자이다. 그의 사자후는 언제나 불처럼 뜨겁고, 그의 함축되고 잘 정돈된 메시지는 어떤 강단에서 외쳐지든 간에 양날 선 칼처럼 우리들의 심령을 쪼개고 또 쪼갠다. 실제로 본인이 만난 잘 믿는 평신도들 가운데는 예수를 믿게 된 동기를 묻는 나에게 ‘김충기 목사의 부흥집회 때 예수 믿게 되었다’거나 ‘김충기 목사의 집회의 말씀을 거꾸러져 오늘날 장로가 되었다’고 고백하는 사람을 여럿 만났을 정도로 그의 설교는 가히 영감 넘치는 권능의 설교이다.


이와 같이 김충기 목사는 말씀 중심의 사역자였으며, 성령이 역사하시는 기도를 하였으며, 위기를 이기는 소명의식을 지닌 사람이었다. 또한 그는 복음 선포와 교회개척을 자신의 소명으로 알고 열정을 쏟는 능력의 설교자였다. 그의 저서로는 구역예배설교, 생명을 아끼시는 하나님, 우리를 간섭하시는 하나님, 인간으로 오신 하나님, 남겨두신 하나님,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그리는 하나님이 있다. 


9. 부흥 운동의 공헌


김충기 목사의 부흥운동이 기독교한국침례회 교단뿐만 아니라 한국 기독교 전체에 끼친 공헌은 수량으로 측정할 수 없는 지대한 것이었다.


1) 동아기독교와 기독교한국침례교회의 가교 역할

1946년 2월에 충남 칠산에서 교단 재건 회의를 했을 때의 동아기독교 잔존 교세는 남한 교회 40개와 약 350명의 교인에 불과하였다. 유력한 타 교파에 귀속하자는 통합론까지 대두되었던 형편이었다. 그러나 하나님의 역사로 한 명의 젊은 동아 기독교인이었던 청년 김충기가 성령의 능력을 받게 되자 기독교 한국 침례회의 중심 인물로 자리잡게 되었다. 미국 남침례교회가 미친 영향보다는 동아기독교의 뿌리가 더욱 강했던 김충기 목사는 그러므로 동아기독교와 이후 침례교 접목의 중심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고 할 수 있다.


2) 침례교의 위상이 높아짐

타교파에 의해서 이단시되고 배척되었던 침례교의 위상을 크게 드높이고 침례교의 성서 중심성과 복음성을 크게 홍보함으로써 침례교단이 한국 교회의 당당한 중심 교단으로 자리 잡는데 결정적인 공헌을 하였다. 한번은 감리 교단에서 감리사의 위치를 가진 감리교 목사가 시무하는 감리교회에서 부흥 성회를 인도하게 되었다. 침수례의 성경적 의미를 설파하자 감리교 목사는 큰 은혜를 받고 감리교인 40명에게 침수례를 베풀도록 허락하였다. 이 사건으로 말미암아 그 감리교 목사는 감리사 총리국이라는 곳에 소환 당하여 감리사 직분을 해고 당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감리교 목사는 다시 김충기 목사를 초청하여 부흥회를 자기 교회에서 개최하였다. 감리사 직분 해고 당하는 것보다 은혜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 감리교 목사의 가문은 감리교단 내에서 큰 부흥을 이룬 가문이 되었다.

대구에서도 처음에는 김목사를 이단시하던 장로 교회 목사들도 나중에는 도리어 대구에 머물러 달라고 간청했다. 또한 1990년 8월에 하루 일만 명에게 침수례를 베푼 침례교 세계대회를 서울에 유치 한 것은 침례교회의 위상을 최고로 높인 역사적인 사건이었다.


3) 부흥을 위한 성령운동이 필요함

김충기 목사의 부흥 성회는 교회의 영적, 숫자적 부흥에는 성령의 역사에 의한 기적과 은사가 꼭 필요한 것임을 한국 교회에 깨우쳐 준 공헌이 있다. 미국에서는 이미 1901년부터 성령 은사 운동이 일어났으나, 미국에서는 이미 성령 은사 운동은 백안시 되고 있었다. 1960년대에 이르러 미국의 성령 은사 운동은 전 교단으로 확산되었고 교회 역사가들은 이를 가리켜 카리스마틱 운동 (Charismatic Movement) 라고 하였다. 1960년에 성령의 은사와 능력을 체험한 김충기 목사는 외국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운동에 관해서 들어 본 적도 없었다. 입에서 저절로 흘러나오는 언어가 무엇인지도 알지 못했다. 온 육신을 감싸는 불과 진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이러한 역사가 일어나면 죽은 영혼들이 살아나고 교회가 부흥되는 산 증거를 보여주었으니, 성령의 은사를 몰랐던 한국 교회에 성령의 능력을 소개한 공헌이 지대하다고 하겠다. 성경공부에 의한 교회성장도 교회를 세우는 한 방편이 되겠으나 성령의 은사에 의한 교회 성장도 폭발적인 위력이 있는 방편임을 증거하였다. 사도행전적 역사는 집회마다 일어났다.


4) 획기적인 기도원 시스템 구축

김충기 목사는 한국 기도원 운동 사상 기도원의 위상을 획기적으로 높여주는 공헌을 하였다. 호텔급의 숙소와, 최상의 경치를 갖춘 전경, 일류 식당급의 배식 시설, 맑은 공기를 흡입할 수 있는 체육 시설, 일류의 집회 시설을 가진 양수리 수양관은 단지 기도 처소로서가 아니라 종합적인 기독교 수양 시설의 지평을 열었다. 전국 목회자, 사모, 평신도 지도자들이 수준 높은 시설의 혜택을 누리며 하나님과의 관계를 재정립하고 영적 전쟁의 능력을 충전하는 한국 교회의 보배가 되었다.


5) 개교회 부흥의 모델 

김충기 목사는 부흥되는 개교회의 전형적인 모델을 제시했다는 공헌이 무엇보다도 큰 것이지만, 부흥의 과정 속에서도 끊임없이 교회 개척을 시도하는 모범을 보인 점이 큰 공헌이라 할 수 있다. 단순히 물질적인 지원을 제공하는 데서 그치지 않고 필요한 경우에는 적지 않은 숫자의 교인들을 아낌없이 함께 보내주었다는 점이 특이한 것이다. 1997년 5월에 설립된 분당 강남중앙침례교회나, 2001년 1월에 개척된 일산 강남 중앙 침례교회, 2002년 1월에 개척된 용인 강남중앙침례교회의 예가 그 명백한 증거이다. 물론 물질적 지원으로 설립된 여러 군부대의 교회나 지역교회들은 열거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다. 그러나 인적 자원의 지원까지 마다하지 않은 개척지원의 모델은 분명 다른 데서 찾아보기 어려운 큰 마음의 선교라고 하였다.


10. 결론

한 인간으로서 감당키 어려운 초인적인 역사를 이룬 김목사는 침례교단의 역사에 길이 남을 인물이 되었고 비록 몇 번의 건강상 위기를 맞기도 하였으나 그래도 불굴하고 사역을 계속하는 투지의 모범은 감히 추종을 불허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권과 정치권을 한 손에 쥐었던 권세의 종인 엘리야가 승천해도 갑절의 영감을 받은 엘리사를 하나님께서 세우셨듯이, 침례교단의 역사에 김충기 목사의 뒤를 이어 그 겉옷을 이어 받아 갑절의 역사를 이룰 젊은 주의 종들을 일으켜 주시기를 기원한다.